빚진자TV 말씀묵상나눔

[성경묵상나눔 006] 누가 내 이웃입니까? 아니, 나는 누구입니까? -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본문

개인 묵상 나눔

[성경묵상나눔 006] 누가 내 이웃입니까? 아니, 나는 누구입니까? -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빚진자TV 2020. 6. 28. 16:59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그 옛날, 로마가 거대한 지중해를 통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동의 넓은 영역을 다스렸죠.

 

이스라엘도 여기에 속해 있던 속국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정복했으며,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있던 메시야라는 존재가 나타나 로마의 통치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각종 기적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기적으로 눈으로 체험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과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던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를 일컬어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메시야

 

---------------------------------

 

만일 그가 메시야라면,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이건 보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정말로 메시야인지, 아니면 메시야를 사칭하는 사기꾼인지를 잘 판별하고 분별해야만 합니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그가 메시야임을 확신하고 밤중에 몰래 찾아와 거듭남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가 정말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진리에 대한 탐구심보다도 대부분의 경우는 예수에 대한 반발심이 더 커져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하게 비판하곤 했기에, 상당한 눈엣가시였으나, 대중의 지지를 받던 예수를 함부로 끌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그래서 그들은 대중 앞에서 구약성경의 율법말씀으로 예수를 공격해, 곤란에 빠뜨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으로 데려와서는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무어라 하나이까?” 묻는 종교지도자들의 행태는 바로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만약 율법의 계명대로 돌로 치라고 예수가 말한다면 그간 사랑과 자비를 강조해왔던 그의 행보에 위배되는 상황이며, 돌로 치면 안 된다고 하면 구약 율법의 말씀을 위반하는 행위가 되니, 어느 쪽이든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것이죠.

 

오늘의 이야기도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한 율법교사의 질문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던 중, 한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질문을 던진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셨는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율법교사는 물론 율법에 나온 대로 대답해야 하겠죠. 자신이 율법교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이미 얻은 듯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네 말이 옳다. 너도 가서 이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원래를 예수라는 인물을 시험하고자 이 질문을 던진 것이었는데, 너무 명쾌하게 답이 나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되어야 했습니다.

 

이제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예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 뒤 삶으로 돌아가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면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교사는 더 이야기를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애초에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 이 대화를 시작한 목적이었기 때문이죠.

 

율법교사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 그럼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의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율법교사가 스스로를 옳게 보이려고 이 질문을 던졌다 나옵니다. (10:29)

 

아마 율법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계명에서 스스로에게 찔리는 부분이 있었나 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소개하시며 가르침을 이어갔습니다.

 

-------------------------------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강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강도들은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사람이 다 되도록 만들어놓고는 길가에 버려두게 되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이제 거의 죽게 되었던 그 사람은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기 힘들 정도로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는 그저 누워서 누군가가 지나가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지나갑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순 없었습니다.

 

아이고... 길가에 시체가 버려져 있다니.... 피해서 지나가야겠다...”

 

또한 다음 지나가던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를 두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당대의 종교계에 있어서 핵심부에 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시체처럼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는 그저 지나쳐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시체를 만질 수 없습니다.

 

레위기의 구약 율법에 나와 있는 정결법에 따르면 제사장은 시체를 만질 수 없습니다. 시체는 부정한 것이며 주로 이들은 2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소를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처럼 취급하고 순혈 유대인이 아닌 잡종이라 취급했습니다만, 그 사마리아인은 길에서 강도만난 자를 가까이에서 도와줬습니다.

 

상처 난 곳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하고, 자신이 타고 있던 짐승에 태워 한 주막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막의 주인에게 돈을 주고 혹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에 갚아주겠다 약속하고는 자기 갈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해준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

 

그리고 이 이야기를 마친 후,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

 

율법교사는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이야기를 마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와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인에게는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줬죠.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의 그 선행에 감동했으며, 앞으로 자신도 사마리아인처럼 다른 사람을 도우며 선하게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며 마음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꺼내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읽어내야 하겠죠.

 

표면적으로는 물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가자는 결론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우리에게 삶의 도움을 준 훌륭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적은 저자가 들려주려 했던 그 이상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성경읽기의 핵심이 아닐까요?

 

-----------------------------------

 

오늘 이야기는 이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물은 질문에,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되묻고 계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다른 사람을 돕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이야기의 결론이 나오려면, 예수님은 누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겠느냐?” 하고 물어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왜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뒤바꾸어서 율법교사에게 되물으신 것일까요?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이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는 사람의 입장이야.”

 

사실 율법교사가 질문을 처음 던지던 순간부터 우리는 그가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에 집중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

 

내가 무엇을 해야지 구원을 얻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겠습니까?

 

내가, 내가, 내가.....

 

무엇을 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우리의 신앙은 언제부턴가 내가 반드시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고 복을 받으며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신앙으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나의 열심과 나의 노력이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진 않았나요?

 

그리고 그런 잘못된 신앙관은 대게 우리 주변에 숨어있던 잘못된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우리들에게 주입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

 

율법교사, 그리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주된 사람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율을 철저히 지켜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으며, 이는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할 마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규율을 정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생각이 개입되어있었고, 본래 율법에 있던 하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져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 말씀하시며 크게 비판하셨습니다.

 

율법을 기반으로 그 교리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자신들만의 기준을 세우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보다도 자신이 만들어낸 교리와 법이 더 우선하고 이를 타인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무엇을 해야만 복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세부 조항으로 타인들에게 가르칩니다.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치 스펀지처럼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율법주의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믿고 있던 신념과 당신의 신앙관은 정말로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고심하며 성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그렇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그저 강도만난 사람처럼 길바닥에 누워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처량한 존재일 뿐이야. 그것이 죄인인 너의 운명이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문제는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너는 그저 너를 구해준 이웃인 사마리아인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네가 해야 할 일인 것이야.”

 

우리는 모두 사마리아인을 기다립니다.

 

모두가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유일한 사람은 당시 존경받던 제사장도, 종교를 이끌어가던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사마리아인은 모두가 무시하고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사람들은 거부했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으며, 사람들은 예수 대신 흉악한 죄인을 풀어주라 요구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고통스럽게 죽였으며 그 시체의 옆구리에는 창을 찔러 넣었습니다.

 

모두가 버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유일한 참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만난자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분명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다시 주막으로 돌아오겠노라고...

 

----------------------------

 

우리는 모두 강도만난 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영생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주권은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올바른 신앙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는 것, 많은 봉사를 하는 것,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모두 다 좋은 일이며 마땅히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영혼의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행과 봉사는 구원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인의 행위일 뿐, 그것이 우리 영혼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선행과 봉사는 구원받은 사람이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주권은 오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아멘.

 

---------------

 

우리 보좌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 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