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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03] 예수님이 개취급한 사람 - 수로보니게 여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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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03] 예수님이 개취급한 사람 - 수로보니게 여인

빚진자TV 2020. 6. 12. 15:44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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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방을 들어가십니다.

 

그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은 마태복음에는 가나안의 여인이라고 표현되어 있고,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시리아-페니키아) 여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은 독자층인 유대인을 배려한 표기라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실 때에, 그에 대한 소문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에서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자 했으나,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은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 가서 소리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 딸이 귀신에 들렸어요!”

 

하지만 그 외침에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여인의 외침이 계속되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태복음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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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는 일련의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통해 온 세계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려 하셨습니다.

 

어느 한 나라를 선택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원하셨고, 그 나라는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것이었죠.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19:4-5)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다른 나라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제사장으로 선택받은 나라는 그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시는 위치에서

하나님이 지정해주시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정해주시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좋으나 싫으나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스라엘은 좋으나 싫으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후예로 구성된 사람들이어야 했고,

 

이스라엘은 좋으나 싫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이 계획했던 대로만 잘 살아갔더라면,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다운 모습이었죠.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잘 감당해내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때에 받게 될 복이 신명기 28장에 나와 있습니다. 세계의 그 어떤 민족보다도 뛰어나게 될 것이며,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고, , 전쟁에서도 절대로 패배하지 않게 될 것이고, 하는 모든 일이 잘 되며 기타 등등의 많은 복이 명시되어 있었죠.

 

그러니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도 일단은 이스라엘에게 맞춰져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주어진 민족이었으며 메시아인 예수님을 기다리던 당사자들이었으니, 자신을 기다리던 당사자들에게 가셔서 사역을 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고 있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1차적 사역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태복음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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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가버나움의 인근 지방으로부터 출발하신 예수님은 왜 그 멀고 머나먼 길을 지나와서 두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외국 땅에 오셔서는, 딱 이 여인을 만나고는 그곳을 떠나십니다. 마치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이 지방에 오신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여인을 만난 후에는 데가볼리 지역으로 가시는데 이곳도 또한 이방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는데, 여기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4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입니다.

 

아니... 말씀하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태복음 1524) 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이런 행보를 보이신다는 것은 언행불일치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웃긴 상황 아닙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다니십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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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곳에 오시기 전, 예수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죠. 바로 가버나움 지방에서 식사 전 손을 씻는 문제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하신 후였습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 이방인의 땅으로 가셔서 이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보란 듯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푸신 것이죠.

 

처음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에 무엇이라 불렀나요?

 

바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선생이여’, ‘랍비여’, ‘선지자여등의 말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부르는 말입니다. 이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그리고 그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선택받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졌을 기적의 사역은 바로 다음 타자인 이방인에게로 넘어간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민족답게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잘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적과 사역을 보며,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며 그가 진짜 메시아인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 앞에 메시아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버립니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이방인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찬양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나 저와 같은 개혁주의 신앙의 전통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택함 받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세계관과 지성, 그리고 온전한 인격은 창조주 여호와와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것으로 합당한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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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제 더욱 큰 목소리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태복음 1525)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이야기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본인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그 여인을 라고 칭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굉장히 모욕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 대해서 개라고 표현하다니요. 하지만 예수님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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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런 경멸에 가까운 말을 사용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예수님의 자비를 원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 의견에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서 고침이 필요한 상황인데,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그녀의 마음 하나조차도 모르실 분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라는 단어에 대해서 굉장히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개에 대해서 마치 자식과 같이 표현하기도 하죠.

 

실제로 여기에서 사용된 라는 단어의 원문은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이라는 단어의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이에 대해서 대비되는 단어인 퀴온(κύων)’이라는 단어가 또 있는데, 이는 길거리의 들개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퀴나리온(κυνάριον)’이라는 단어는 경멸적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작은 애완 강아지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달리 표현하면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메시아라 부르는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이여.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 할 복음의 사역이 이방인인 당신에게 향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마땅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라고 한다면, 당신은 마치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좋은 음식을 먼저 자녀들에게 주듯, 당신에게 먼저 좋은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즉 이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당신은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그저 이야기해준 것일 뿐,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비하하거나 모욕감을 주기 위한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각기 다른 은혜에 대해서 자녀와 개로 비유하여 설명하신 것뿐입니다.

 

유대인을 통한 인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엄정한 사역의 수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은 왜 유대인이 먼저인 것이냐?, 우리 한국인은 차별하는거냐?”,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며 너무한 것 아니냐?”와 같은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반응은 바로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배울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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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떡을 먹지 않으려 하는데, 그 구원의 은혜의 부스러기만큼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돌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단순히 모욕적인 상황을 딛고 일어서서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칭찬한 큰 믿음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차원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님은 또 누구인지, 예수님의 사역의 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명확한 자기객관화가 가능했던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신은 선택받은 백성의 일부가 아니기에 그에 대한 권리와 특권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당당하게 나아와 그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방인이었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라는 제사장 나라를 통한 만국의 구원사역을 넘어서서, 이제는 하나님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되는 세상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또 어떤 분인지,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또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구원이라는 놀라운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치 선택받은 민족답지 못했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구원받은 사람답지 못한 기독교인이라면 그 구원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로부터 다른 이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그리스도인의 지성,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을 갖추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 한 구절 나누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