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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08] 질투, 그것으로 놓쳐버린 진정한 예배 - 가인과 아벨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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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08] 질투, 그것으로 놓쳐버린 진정한 예배 - 가인과 아벨 이야기

빚진자TV 2020. 7. 6. 15:55

 

 

 

창세기 43~8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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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야기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주로 질투와 그에 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해서 다룰까 합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질투라는 주제만으로 다룬다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많은 관점 중 하나일 뿐이지,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모든 이야기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밝혀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 해서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그 전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는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어버렸죠.

 

그리고 이들은 자식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가인은 형으로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동생으로 양치는 일을 했다고 성경에 나옵니다.(4:1)

 

어느 날, 세월이 흘러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답게 땅에서 나온 수확물로 제사를 드렸을 테죠. 아벨은 마찬가지로 양치는 사람답게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죠.

 

결국 가인은 그 사건으로 인한 분노로 인해서 동생인 아벨을 쳐서 죽이고 맙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오늘의 본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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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청년이었죠.

악기도 연주하고 찬양 리더도 하며 뭇 자매들의 마음을 휩쓸었습니다.

 

교회 내, 일정 나이가 되지 않으면 연애를 할 수 없다는 다소 보수적인 규칙이 없었더라면 많은 자매들은 이미 그 형제에게 숨겨왔던 마음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때마침 교회에는 다른 형제도 없었습니다.

 

남자라곤 본인뿐, 다른 모든 청년부의 회원들은 전부 여자들이었기에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새로운 다른 형제가 그 교회로 등록합니다... (뚜둔!!)

 

물론 이 새로 등록한 형제가 그저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에 문제가 되었죠.

 

대학도 이름 있는 유명한 곳을 다녔으며,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게다가 악기연주도 본래 있던 그 형제보다 누가 보더라도 실력적인 부분이 앞서 있었습니다.

 

게다가 혜성처럼 새로 등장한 이 남자는 유머 감각까지 갖췄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할 때마다 자매들이 이제는 그 새로운 형제와 같은 그룹이 되고자 간절히 예배 시간에 기도합니다.

 

본래 하나뿐이었던 남자 청년이 그렇다고 어디 하나 못난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괜히 심난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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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일으키는 존재를 마주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입니다.

 

상대적으로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나 자신을 더 초라해보이게 만들거든요.

 

이 때, 우리는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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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질투심과 분노를 느끼게 되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음 속에 분함이 가득한건 어찌됨이냐?“

 

가인은 그 분노와 질투심을 참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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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질투심을 느낀다는 것은 질투의 대상처럼 되고 싶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아벨처럼요.

 

인기가 많았던 기존의 남자 청년은 새로 등록한 청년처럼 악기도 더 잘 연주하고 지성적이고 유머 감각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질투를 느낀다는 것은 롤모델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방향으로 행동을 이어가게 하는 경우, ‘질투의 대상’, 혹은 시기의 대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자기발전의 방향으로 행동을 이끌어가게 되는 경우 롤 모델이라고 표현하는 것 뿐이라 여기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질투와 같은 감정을 느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작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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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질투심을 느낄 때에 했어야 할 올바른 행동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아벨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는 것이고, 내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아우야, 어찌하여 하나님은 내 제사는 받지 않으셨고 너의 제사는 받으셨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의 제사를 받아주실지 조언을 해주지 않을래?”

 

그리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한 번 삶의 자리로 돌아와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창피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책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형이 되어서 동생만도 못한가 하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롤모델의 모습으로 한 단계,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렇게 하기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서 개선되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저 녀석이 사라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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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데에, 하나님은 그 이유를 가인 스스로에게 두고 계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4:7)

 

"내가 제사를 안 받은 거? 내가 받기에 합당한 제사가 아니었어. 너의 마음이 선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너의 제사를 받으라는 것이냐?“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뿐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 자체도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3-4)

 

가인이 제물을 드리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죠.

 

마태복음의 가르침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먼저 예배하기에 합당한 자로서 준비된 자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4)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점(11:4)과 가인이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선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4:7)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벨이 첫 새끼를 드렸다는 점과 동물을 제물로 드려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점 등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라 하더라도, 가인의 올바른 이후의 반응은 그럼 나의 제사는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셨는가?”를 되돌아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위해서 삶으로 돌아가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피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었고 그게 문제였다? 그럼 가인은 돌아가 양을 죽이는 피의 제사를 드려야하겠지요.

 

만일 하나님이 첫 수확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었고 그게 문제였다? 그럼 가인은 되돌아가 첫 수확물로 제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 난 뒤, 가인의 행동은 틀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여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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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합니다... 자신이 가장 되고 싶은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림으로써 가인은 더 이상 롤 모델이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없애버리고 현재의 부족한 모습으로 정체되어있기를 선택한 것이죠.

 

그럼 이제 가인에게는 더 이상의 발전적인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가인은 처음 제사를 드릴 때에 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을까요?

 

아벨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아벨에게 조언을 구하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제안했을 가인이었더라면 애당초 처음부터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새로 온 청년에 대해서 기존의 남자청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애당초 새로 온 형제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 악한 계획을 실행할 사람이라면, 그가 처음부터 교회에서 보여줬던 모든 예배와 신앙에 투철한 모습은 혹시 선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노리고 연출한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어렵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그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