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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42] 라반을 떠나고자 하는 야곱의 이야기 -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영역에 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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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42] 라반을 떠나고자 하는 야곱의 이야기 -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의 영역에 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빚진자TV 2023. 12. 5. 21:37

https://youtu.be/ruALTlNC3hQ

 
 
형 에서를 속이고 이삭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에서 라반의 두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고 라반을 위해 14년을 일합니다.
 
그동안 야곱은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여종을 통해서 여러 자식을 낳았죠.
 
라헬이 요셉이라는 아들을 낳은 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야곱은 라반에게 말을 건넵니다.
 
오늘의 묵상은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함께 나눌 말씀은 창세기 30장 25절에서 30절 말씀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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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서 요셉이라는 아들을 얻게 된 후,
 
야곱은 라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삼촌! 이제 제가 외삼촌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제가 외삼촌을 위해서 일을 하면서 얻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가게 해주세요. 제가 외삼촌을 위해서 한 일들을 외삼촌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라반은 야곱을 떠나보내기가 싫었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조카 야곱아. 물론 잘 알고 있단다. 너로 인해 여호와께서 나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내가 깨달았단다. 이제부터는 너의 일하는 노동에 대한 품삯을 정하면 너에게 그것을 줄테니, 네가 나를 생각한다면, 나와 함께 있어다오.”
 
사실 여태껏 야곱은 아무런 품삯을 받지 않으면서 라반을 위해 일해왔습니다.
 
14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해온 것은 라반의 딸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였죠.
 
본래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 동안 일하기로 되어있던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먼저 결혼한 뒤, 라헬을 위해 다시금 7년을 연장하여 일하게 된 것이지요.
 
총 14년의 세월을 아무런 품삯을 받지 않고 일을 하며,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고 아내와 여종을 통해 11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야곱의 노동에 대한 품삯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품삯에 대해서 말하기 전, 이야기합니다.
 
“외삼촌! 제가 그동안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돌보아왔는지를 잘 아시지요?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번성하여 가축이 떼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제 발이 닿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그간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장인어른이자 외삼촌인 라반을 섬겨왔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어서 말합니다.
 
“하지만 외삼촌! 저는 언제쯤이나 저의 집을 세우겠습니까?”
 
14년이라는 세월을 라반을 위해 일하며 아내와 자식까지 생겼지만, 정작 본인의 재산은 없는 야곱의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라반의 재산을 불려줘봤자 그것은 야곱이 상속받을 재산도 아닙니다.
 
그 재산은 라반의 아들들이 물려받게 되겠지요.
 
그러니 야곱이 언제쯤이나 자신의 집을 세우겠냐는 이 말에는 분명 호소력이 있습니다.
 
이에 라반이 대답합니다.
 
“그래 야곱아. 그럼 내가 너에게 무엇으로 품삯을 주면 되겠느냐?”
 
“외삼촌은 저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대로만 해주신다면 저는 계속해서 외삼촌의 가축들을 먹이고 돌보겠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제가 오늘 외삼촌의 양 떼를 두루 살피며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이 있는 것, 그리고 검은 것을 가려내고, 염소 떼 중에서는 점 있는 것들과 아롱진 것들을 구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것들이 저의 품삯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나중에 외삼촌이 오셔서 저의 재산을 조사할 때에, 제가 가진 양 떼 중에 검지 않은 양이 있다든지, 염소 중 아롱지지 않은 것이나 점이 없는 놈이 있다면, 그건 제가 외삼촌의 재산을 도둑질한 것으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야곱은 온전한 흰 양과 온전한 색상의 염소를 제외한 나머지를 품삯으로 요구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사실 이는 야곱에게 불리한 내용입니다.
 
양은 대개 희고 염소는 대개 검거나 흰 색상입니다.
 
그 이외의 점박이나 얼룩무늬 색상을 가진 양과 염소는 흔하지 않습니다.
 
라반은 이런 조건을 거는 야곱의 말에 수긍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너의 말대로 하자꾸나.”
 
그런데 라반은 이 말을 야곱과 마친 뒤, 곧바로 야곱이 이야기했던 색상의 양과 염소들을 자기 아들들에게 맡겨버리고는 사흘 길이 떨어진 거리에서 돌보게 했습니다.
 
조건 자체도 야곱에게 불리한 조건이지만, 라반은 야곱에게 한 마리의 양과 염소도 주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여태껏 14년 동안 야곱을 무일푼으로 부려먹은 라반의 심보가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하진 않겠지요.
 
결국 야곱은 온전한 색상의 양과 염소만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곱은 아무것도 품삯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인 듯합니다.
 
하지만 이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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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온전한 색상의 양과 염소를 돌보면서 이상한 일을 합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는
 
양들이 개천의 물 구유에서 물을 마시러 와 짝짓기를 할 때, 껍질 벗긴 나뭇가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껍질 벗긴 나뭇가지 보면서 짝짓기를 한 양들은 신기하게도 줄무늬가 있거나 얼룩이 지거나, 반점이 있는 등의 무늬를 가진 새끼를 낳았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흰 양끼리 교배를 해서 낳은 새끼가 얼룩진 것이나 아롱진 것이 나오고, 온전한 색상의 염소끼리 교배를 해서 낳은 새끼는 얼룩지고 아롱진 것이 나왔으니 말이죠.
 
심지어 야곱은 튼튼한 양이 짝짓기를 할 때엔 그 나뭇가지를 보여주고, 허약한 양이 교미를 할 때엔 나뭇가지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라반의 몫이 될 흰 양과 검은 염소는 약한 개체로 태어나고, 야곱의 몫이 될 얼룩지고 아롱진 양과 염소들은 튼튼한 개체가 태어나게 되었죠.
 
그렇게 야곱의 품삯이 될 튼튼한 양과 염소가 점차 많아지게 되었고, 야곱의 재산은 나날이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도 많아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 창세기 30장의 내용의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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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야곱이 온전한 양과 염소를 통해 얼룩지고 아롱진 새끼들을 얻은 과정에 대해 의문점을 가졌습니다.
 
특정 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와 그 껍질을 벗겨 짝짓기 중인 양과 염소에게 보여주면 특정한 무늬를 가진 새끼를 임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성경 본문은 너무나도 비과학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본문에 대해 어떤 다른 참고자료에서는 야곱이 이미 멘델의 유전법칙을 알고서 열성인자를 가진 양과 염소만을 골라내어 교배를 시켰다는 식의 설명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설명 역시도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열성인자의 유전자를 지닌 양과 염소만을 구분해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그 새끼들의 유전자가 열성인자만으로 구성되어 태어나는 확률은 4마리 중 1마리 꼴입니다.
 
물론 이것도 다른 요인을 배제하고 정말로 단순하게 생각해서 나오는 확률입니다. 실제로는 그보다도 더 적은 비율로 태어나겠죠.
 
이 부분 또한 설명이 빈약했기에 저는 당최 해당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어떤 성경적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나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성경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죠.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다 보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본문을 접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이죠.
 
야곱이 짝짓기 중인 흰 양이나 검은 염소들에게 어떤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보여준다는 그 행위만으로, 어떻게 원하는 무늬의 털을 가진 새끼들이 태어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들은 이외에도 셀 수도 없이 많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적 사건과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의 묵상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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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만난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내용에서도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고백한 바 있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 육으로 난 것은 육이며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그 말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과 같다는 이야기들은 본문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봐도 저의 지성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속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는 여러분과 차마 나눌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어찌 여러분에게 성경 묵상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저의 무지함을 함께 나누며 묵상의 결론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죠.
 
“마치 우리가 처음 어머니의 품에서 새 생명이 시작될 때에, 오직 우리의 부모로부터 주어진 생명이었을 뿐, 그 과정을 이해하고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듯,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과정 역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과정이며, 우리가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석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해야 하는 어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오직 하나님께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록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내 삶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나는 거듭남의 결과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시 저는 앞으로 제가 차마 다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대하기로 다짐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도 그때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묵상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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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성경 출애굽기의 내용이죠.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라는 지도자는 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 땅을 떠나 자유를 누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를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지만 파라오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 10가지의 재앙이 내리셨고, 이집트의 백성들은 그 재앙으로 죽어가며 고통받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재앙이 내려지지 않게 그들이 살던 땅을 구별하셨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이집트 땅에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게 되리라는 재앙이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재앙을 피할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재앙이 내려지는 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었죠. (출 12:7)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며 이집트 땅을 두루 다니실 때에, 그 어린 양의 피가 보인다면 하나님의 재앙이 그 집은 넘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재앙으로 인해 파라오의 첫째 아들을 비롯한 모든 첫째 난 사람들과 짐승들이 모두 이집트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파라오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이집트 땅을 떠나라고 명령했죠. (출 12:31)
 
그런데 여러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론 지금 당장 재앙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어린양의 피가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은 일단 접어두고 명령에 충실해야 했겠죠.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요?
 
“재앙이 오는 것은 사실이라 치더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하나?”
 
“피를 바르는 것이 죽음을 막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무슨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서 이 행위가 재앙을 피하게 된다는 거야?”
 
과연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을까요?
 
마치 오늘의 본문을 보며 이렇게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듯 말이죠,
 
“야곱이 나뭇가지를 양과 염소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그 새끼들의 털 무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비과학적인 내용이 성경에 기록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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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야기를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언급했던 광야에서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의 이야기입니다.
 
자유를 얻어 이집트를 빠져나와 약속의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모세에게 불평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잘살던 우리를 왜 이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로 끌고 나와 고생을 시키느냐?”
 
이 불만을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자, 모세는 하나님께 이 백성을 살려달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대 위에 불뱀을 하나 만들어 매달아 놓으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그것을 장대에 달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죠.
 
분명 모세는 외쳤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여기 이 장대에 달린 뱀을 쳐다보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 불뱀에게 물려 온몸에 독이 퍼지고 있는 와중에, 저 놋으로 만든 가짜 뱀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고?”
 
“지금 해독제를 가져와도 시원찮을 판국에, 저걸 쳐다보는 게 과학적으로 내 몸에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그걸 보라는 것이냐? 차라리 물을 한 잔이라도 더 마시는 게 독을 중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으니 난 그거 쳐다볼 시간에 물을 찾겠다.”
 
마치 오늘의 본문을 보며 이렇게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듯 말이죠,
 
“야곱이 나뭇가지를 양과 염소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그 새끼들의 털 무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비과학적인 내용이 성경에 기록이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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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봅시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에서 나왔던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르게, 오늘 본문의 경우 야곱이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양과 염소에게 보여준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지 아닌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야곱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위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는 내용이죠.
 
하지만 야곱은 창세기 31장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야곱의 품삯의 조건을 라반이 10번씩이나 변경해가며, 점 있는 것이 야곱의 삯이 되리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점 있는 새끼만을 태어나게 하셨고,
 
라반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 야곱의 삯이 되리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얼룩무늬 있는 새끼들만 태어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창 31:7-9)
 
즉, 야곱이 했던 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야곱의 독단적 행위였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양과 염소의 새끼들을 야곱의 삯으로 태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야곱은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야곱에게서 배워야 하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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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나의 이성과 지성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이야기가 등장하면 어떻게든 그것을 설명하고 규명하며 이해 가능한 수준의 이야기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파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사람들도 이해가 가능한 수준의 이야기로 만들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시도가 용납될 수 없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영역을 분명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직접 기록하신 특별계시의 영역에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건,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의 사건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성자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기록까지,
 
과학적으로 설명되거나 나의 지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에 기록으로서 실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그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혹은 모든 것이 상징이나 신화, 전설과 같은 이야기라 치부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이 이야기들은 결코 가볍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인 고증이나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 가능한 영역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무조건 옳지 못하다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성경을 더욱 객관적으로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주고, 어느 정도는 성경을 읽으며 드는 의문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명백하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며 정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사역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의 영역까지도 그러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정말로 상당히 위험한 행위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은 기록을 하나의 신화나 전설로서 설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부활의 사건을 제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그렇게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들에 대하여 비겁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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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경은 아굴의 잠언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6)
 
또한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때에는 가감하지 말라 권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 4: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언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19)
 
이 성경 구절들은 각각 잠언에 대하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에 관하여 기록된 내용이지만, 이것이 성경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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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아내들에게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양과 염소가 보게 하는 행위가 어떻게 기적을 일으켰는지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저 아내들에게 온전한 색상의 양과 염소 사이에서 얼룩지고 아롱진 무늬의 새끼들이 태어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창 31:9)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과 사건들에 대한 우리들의 올바른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결심,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겠다고 강한 의지로 성경을 본다 한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 대하여 믿음이 생기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이야기를 믿게 하시는 이는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묵상을 함께 들으며 성경에 기록된 이 기적의 사건들이 나에게 실제적인 과거의 역사로서, 기록된 대로의 사실로서 믿어지는 분들이 계신다면,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립시다. (엡 2:8-9)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빌 1:6)
 
또한 만일 이 묵상을 들으며 여전히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며 기도합시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 12:3)
 
누가 믿음의 선물을 받기로 예정된 자인지, 누가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는 자인지는 그 어떤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딤전 2:4)
 
그러니 믿음과 구원의 문제는 피조물인 내가 어찌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 선물을 구하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로서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언젠가 나의 주변에 그 열매가 열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당당히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마 16:16)
 
“예수는 나의 주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롬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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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마무리하며 찬양을 한 곡 들었습니다.
 
머스트워쉽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함께 가사를 나누며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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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네 짐을 내게 놓아라
 
나의 최선과 열심, 그 어떤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그 은혜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감당하셨네
연약한 날 위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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