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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41] 레아와 라헬의 합환채 거래 이야기 - 무엇이 라헬을 임신하게 만들었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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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41] 레아와 라헬의 합환채 거래 이야기 - 무엇이 라헬을 임신하게 만들었나?

빚진자TV 2023. 11. 8. 19:53

 

 
 
지난 묵상에서 우리는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 그 자녀들을 낳는 과정 중에서 그들의 관계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묵상 내용은 그 가운데에 있던 한 사건의 내용입니다.
 
함께 묵상하실 말씀은 창세기 30장 14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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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먼저 레아를 통해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라는 아이들을 갖게 되었고,
 
그 뒤 라헬의 시녀인 빌하를 통해 단과 납달리를 얻었으며,
 
다음으로는 레아의 시녀인 실바를 통해 갓과 아셀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시점에서 아직 라헬은 자신이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없었던 상태였죠.
 
어느 날,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은 들에서부터 합환채라는 식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합환채란 맨드레이크라 불리는 식물로 다른 성경에는 자귀나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합환채는 뿌리 모양새가 인간의 하체를 연상시키는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뿌리에는 알칼로이드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복용 시 강력한 환각이나 최면의 효과가 있고, 열매는 이 환각성분을 활용하여 최음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식물이 합환채, 또는 자귀나무로 성경에 번역된 데에는, 합환(合歡)이라는 말의 의미와 더불어 자귀나무가 갖는 부부 금실의 상징을 가져와, 남녀 사이를 좋게 만들고 부부관계를 더 좋게 만들어주는 묘약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이처럼 번역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야곱이 살던 시기에도 이 합환채는 매우 귀한 식물로 여겨졌고, 특히 여인들이 이것을 먹으면 임신 촉진제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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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우벤은 들에서 구한 이 합환채를 자신의 어머니인 레아에게 가져다줍니다.
 
그것을 본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말합니다.
 
“언니! 언니의 아들 르우벤이 가져온 그 합환채를 저에게 좀 주세요.”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라헬은 그 합환채를 통해 야곱의 자녀를 가지게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라헬은 비록 자신의 여종을 야곱에게 주어 자녀를 갖긴 했지만, 본인은 정작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몸소 가질 순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니 레아는 자신이 직접 남편의 아이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 여종까지도 남편에게 주어 라헬보다 더 많은 아이를 가진 상황이었죠.
 
라헬은 남편의 아이를 직접 잉태하고 싶다는 염원이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라헬은 르우벤이 레아에게 가져다 준 합환채를 보고 가지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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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레아는 대답합니다.
 
“라헬! 네가 나의 남편을 빼앗은 일은 보통 작은 일이 아니거늘, 이제는 내 남편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내 아들이 나에게 준 합환채까지 빼앗아가려 하는 것이냐?”
 
사실은 레아에게 있어서도 이 합환채는 정말 간절한 물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서 레아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죠. (창 29:31)
 
아무래도 레아는 이 합환채를 이용해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합환채는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부부 사이도 좋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식물이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동생 레아가 가져가고자 하니 얼마나 얄미워보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들이 살던 고장에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풍속이 있었기에 따지고 보면 야곱과 먼저 결혼한 레아야말로 야곱의 진정한 본처라 할 수 있습니다. (창 29:26)
 
하지만 본처인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기에, 레아의 관점에서, 라헬은 남편을 빼앗은 동생이라 여겨질 법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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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은 대답했습니다.
 
“레아 언니, 언니가 나에게 합환채를 주신다면, 그럼 나의 남편 야곱이 언니와 잠자리를 갖도록 하겠어요. 어때요?”
 
라헬은 야곱이 레아와 잠자리를 갖도록 하는 것으로 합환채를 가져가는 것을 협상합니다.
 
얼마나 야곱이 동생 라헬만을 사랑하고 언니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는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둘 다 야곱의 아내였지만, 동생 라헬은 남편과의 잠자리를 협상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였고, 심지어 레아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아하니 말이죠.
 
이쯤 되면 레아가 정말 처절할 정도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네요.
 
어쨌든 레아의 입장에서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자신이 합환채를 얻은 것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는데, 굳이 그게 없더라도 남편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은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겠죠.
 
그날 저녁 언니 레아는 야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곱! 오늘 밤 저와 함께 밤을 보내주세요. 제가 르우벤이 저에게 가져온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었고, 오늘 밤은 당신이 저와 함께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야곱 역시도 라헬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를 간절이 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야곱은 기꺼이 레아의 말대로 했던 것이겠지요.
 
라헬이 합환채 얻고자 했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갖고자 이런 거래를 했다는 뜻임을 야곱 또한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죠.
 
그날 밤, 야곱은 레아와 동침하여 밤을 보냈고, 레아는 아들 스불론과 딸 디나를 이후에 낳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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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후 합환채를 얻게 된 라헬은 그것을 먹고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물론 나중에 라헬 역시도 요셉과 베냐민을 낳지만, 이 합환채로 인해 갑자기 없던 임신의 능력이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여성의 임신에 있어 합환채가 미치는 생리학적 영향은 없습니다.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당시 고대인의 믿음이었을 뿐이죠.
 
그럼 라헬은 어떻게 요셉과 베냐민을 낳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바로 여기에 오늘의 묵상의 핵심이 있습니다.
 
라헬이 출산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성경이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창 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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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라헬이 결정적으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경적 교훈이 무엇일지 묵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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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는 ‘귀인(歸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귀인이란 원인의 귀착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그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죠.
 
심리학에서 말하는 귀인에 대한 이론은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그 행동을 한 이유를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 선택 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사람의 주변 상황이나 환경 등은 행동의 원인으로는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론입니다.
 
즉, 사람들은 신호등을 위반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급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개인의 외부 상황에 행동의 원인을 두는 것이 아닌, ‘저 사람은 성격이 급한 사람일 것이다.’와 같은 개인의 성격에 원인을 두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개인의 어떠함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귀인에 대한 이론입니다.
 
그래서 때론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잘못된 원인만을 생각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는 것이죠.
 
학생에게는 그 학생의 여건과 상황을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네가 게으른 것이 공부를 못하는 원인이야.’ 라고 말하며, 행동 실행을 위한 동기부여만을 강조한다 던지,
 
차량통행이 많은 교차로의 교통환경에서 꼬리물기가 이어지는 교통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도로교통 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운전자 개인의 윤리의식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건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만으로 잘못 생각하여 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귀인오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합환채 사건과 라헬의 임신 사건도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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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임신한 이유에 대해서 그 당시의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합환채를 먹은 시점과 라헬이 임신한 시점에 시간 차이가 있더라도, 합환채를 먹고자 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했기 때문에 임신한 것이 아닐까?’
 
‘라헬이 임신하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 결과도 없었을 거야.’
 
‘결국 요셉을 임신해 아이를 낳다니, 그간 라헬의 노력이 빛을 봤구나.’
 
이렇게 라헬의 임신 사건에 대해서 라헬 개인의 어떠함이 사건의 원인이라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사건의 원인을 라헬의 외부 상황에 두는 것이 아닌, 라헬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로 보는 입장이 대부분의 반응일 것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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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개인의 노력이나 성품, 성과에 원인을 두는 현상은 비단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석이나, 라헬의 임신 사건과 같은 정말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도 있는 상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영혼 구원’에 대한 주제까지도 심각한 귀인 오류를 저지르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대 교회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나눠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묵상을 계속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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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중 상당수는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계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죠.
 
구원받는 사람은 무언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라 여기는 귀인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과정이 있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하지만, 구원에 관한 가르침은 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으며, 결국은 하나의 산을 오르는 여러 길이 있을 뿐이라 주장하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기에, 우리의 선택과 믿음,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면이 있지만, 구원에 관한 올바른 가르침은 역시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잘못된 귀인오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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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이 임신할 수 있었던 원인은
 
임신을 위해 필라테스나 요가 등의 운동을 병행하며,
 
임신에 좋다는 음식을 잘 챙겨 먹으며,
 
때로는 임신에 효과가 탁월하다고 여겨지는 합환채를 얻기 위해, 언니와의 거래를 주저하지 않는 목표를 향한 집념을 갖는 것
 
과 같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라헬이 임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에 대한 문제에 있어 정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원은 어떻게 얻습니까?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까?
우리가 봉사해야 합니까?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출석해야 합니까?
우리가 목사님을 잘 섬겨서 목사님의 기도를 받아야 합니까?
 
전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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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게 강조하여 다시 말하지만, 앞서 언급한 모든 종교적 행위들이 의미가 없고 중요성이 없는 것들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 결정적인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의 인생에는 그 열매가 보이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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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결론을 맡겨드려야죠.
 
그것 말고는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구원에 관하여 그 주권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주권을 가지신 분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답을 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영광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찌 고백해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살아온 시점과 이렇게 기쁨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 시점에 시간 차이가 있더라도, 선행을 베풀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등의 여러 노력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그 결과도 없었을 거야.’
 
‘결국 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리에 오게 되다니, 그간 나의 노력이 빛을 봤구나.’
 
이것들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을 임신하게 된 라헬의 고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도다.” (창 30:23)
 
내가 그동안 어떠한 노력을 해서 아이를 갖게 된 것이 아닌, 바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언젠가 기쁨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될 때, 이렇게 고백합시다.
 
“하나님이 내 죄를 씻으셨도다.”
 
우리가 구원에 관하여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죄를 씻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구원에 관하여 그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들을 가져와 원인으로서 말하는 것은 전부 귀인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이것이 올바른 구원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구원을 바라고 구하며, 그것을 받지 못할까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
 
하지만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선택받은 것에 확신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생.
 
그리고 그 열매를 삶에서 맺으며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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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찬송가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찬양을 함께 부르며,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의 길을 가지신 유일무이하신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며,
 
그 구원의 은혜와 선물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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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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