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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36] 정해진 운명인가? 자유의지인가? -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거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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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36] 정해진 운명인가? 자유의지인가? -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거래 이야기

빚진자TV 2022. 11. 6. 23:49

https://youtu.be/7umaKiOn7-8

 

지난 묵상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머나먼 땅으로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았습니다.

 

바로 리브가라는 여인이었죠.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 결혼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했던 두 사람 사이에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 은혜로 드디어 아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함께 나누실 말씀은 창세기 2523절에서 26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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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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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결혼한 리브가는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브가의 뱃속에서 두 아이가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리브가는 이럴 때 어찌할 줄을 몰라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너의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너의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그렇게 리브가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을 낳았습니다.

 

두 아이는 성장하여 형 에서는 사냥꾼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조용한 성격으로 주로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로 인해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다고 기록합니다.

 

반면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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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에서가 들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은 때마침 먹을 죽을 요리한 상황이었죠.

 

에서는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동생 야곱아. 내가 몹시 피곤한데, 네가 요리한 그 붉은 것을 내가 먹도록 나에게 주려무나."

 

에서는 야곱이 요리한 그 요리가 몹시 먹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야기했습니다.

 

"형이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판다면 이 음식을 형에게 주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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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명분이라 함은 장자권, 즉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이 첫 아들로서의 권리는 상당한 의미를 지닙니다.

 

일반적으로 왕정시대에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 왕위를 이어받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고,

 

과거에는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재산의 상속권도 먼저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장자의 명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이어진 이 약속의 가정에는 재산의 상속이나 가문의 명예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택받은 민족의 계보'를 이어갈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게 됨을 의미하죠.

 

따라서 우리는 이삭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믿지만, 이스마엘을 통한 구원의 역사는 믿지 않습니다.

 

이는 이삭이야말로 구원의 역사를 이어나갈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죠.

 

누가 장자의 명분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갔느냐의 문제는 후대의 사람들에겐 그 믿음의 대상이 달라질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신 하나님을 믿지만, 이슬람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통해 이어지는 계보로 그 역사가 이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이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알고서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노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형에게 이기고 싶었기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에서는 그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의 성경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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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 장자의 명분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

 

야곱은 당장의 맹세를 요구하며 재차 말했습니다.

 

"오늘 나에게 바로 장자의 명분을 팔겠다고 맹세하시죠."

 

에서는 장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할 것을 맹세하고, 야곱은 에서에게 떡과 팥죽을 줬습니다.

 

이것이 오늘 함께 묵상할 본문 창세기 25장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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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오늘의 본문으로부터 이런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당장의 배고픔과 피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팥죽에 눈이 멀어 장자의 명분이라는 소중한 것을 팔아 넘겨버리는 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 야곱처럼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인지를 알아 그것을 쫓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물론 저는 이것 역시도 훌륭한 성경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건에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내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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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에서 리브가가 임신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다시 되짚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5:23)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즉 앞으로 형으로 태어날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어쩌면 오늘 에서가 떡과 팥죽을 위해서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버린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오늘의 본문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0-12)

 

로마서에도 마찬가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미리부터 리브가에게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의문이 올라오지 않습니까?

 

"태중의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누구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는 섬김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잘하고 잘못해서 누가 누구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건, 납득이 됩니다. 하지만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것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니요."

 

오늘의 묵상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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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보면, 과연 역사 속에서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예언이나 구원에 관련된 여러 성경의 구절들을 접하다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린 과연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로봇과 같은 존재일까요? 아니면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주체적인 존재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에서가 장자권을 팔게 된 사건은 에서의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리브가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에 따라 정해진 일이었을까요?

 

또한 야곱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에서에게 팥죽을 만들어준 것도 야곱 스스로의 선택일까요? 아니면 정해진 운명일까요?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정말로 존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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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자유의지의 존재여부에 관한 논쟁은 기독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계속적인 논란이 되어온 주제입니다.

 

특히 물리학의 영역에서, 차원과 시공간, 양자역학 등의 개념이 도입되고 난 후, 이러한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란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진행중입니다.

 

벤자민 리벳이라는 심리학자나 신경과학자 존 딜런 헤인즈 연구진은 과연 인간이 어떤 선택을 내리고 결정하는 것이 정말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까지도 진행한 적이 있었죠.

 

자유의지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영화 인터스텔라나 테넷과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기독교에서 선악과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해 예정과 선택에 관한 구원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논쟁의 주제입니다.

 

선뜻 교회에서 묵상을 나누기 위해 꺼내기 위한 주제로는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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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의 장자권의 거래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일어난 사건인지,

 

혹은 하나님이 정하신 예정에 따라 정해진 운명으로서 일어난 사건인지

 

우리는 확실하게 단정지어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 묵상을 보시는 많은 분들도 다양한 생각이 들겠죠.

 

그러니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성경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살펴봐야겠죠.

 

앞서 우리가 의문을 가진 여러가지의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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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들이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을 스스로 하기 전부터,

 

미리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을,

 

, 야곱의 후예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을 미리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야곱이 살아가며 들판에 나가기를 선호할지, 아니면 집안에 남아있을 것을 더 선호할지 등의 문제와 같이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선택들에는 야곱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에서와 야곱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갈 인물로, 야곱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에서는 선택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분명 이는 에서의 악한 행위나 야곱의 선한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좋으나 싫으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구원의 역사를 이어나갈 인물로서의 삶을 감당해야하며,

 

에서는 좋으나 싫으나 그 역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0-12)

 

만일 오늘의 사건에서 에서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장자권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다른 사건을 통해서라도 구원의 역사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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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제가 과거에 올렸던 선악과의 묵상에 대해서 떠올리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묵상을 나눌 당시 의지적 선택이 뒷받침되지 않는 강요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동시에 두었다고 묵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 멀어질 것을 선택했고, 그 이후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으며, 과거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자유의지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을 할 자유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에 관한 삶의 사소한 선택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부분은 알 수 없어도,

 

적어도 구원의 예정과 택함받음에 있어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타 수행과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는 다른 종교들과 크게 차이점을 보이는 우리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 죄인된 인간의 현실이며, 이를 직시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의 수행과 노력, 선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결국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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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묵상에서는 분명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랑할 것을 권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먼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땐, 내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 지도 모르죠.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에서에게 건네주며 장자의 명분을 손에 넣은 것이 자신의 탁월한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듯 말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하심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듯 말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바로 하나님께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되, 그 택하신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3-7

 

우리의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우리의 성격이나 우리의 성품, 우리의 어떠함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고 베푸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의 온전한 주권을 가지신 분께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오늘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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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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