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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29] 네게브의 그랄로 간 아브라함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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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29] 네게브의 그랄로 간 아브라함의 이야기

빚진자TV 2021. 10. 21. 20:40

https://youtu.be/4ERZU1fZVzo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습니다.

 

소돔 땅에 거주하던 롯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때에, 그곳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았죠. (19:27-28)

 

롯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 이후, 자신이 살던 헤브론 땅에서 벗어나 네게브의 그랄이라는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이동합니다.

 

오늘의 묵상은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네게브의 그랄 땅으로 거주지를 옮겼던 바로 그 이야기에 관한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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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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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헤브론의 살던 곳을 떠나 네게브의 그랄이라는 다른 땅으로 이주하여 이동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진 않기에, 그 이유에 관해서는 신학자들의 추측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새로이 거주할 땅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으로 보입니다.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그랄 땅에서는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아비멜렉이라 부르며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또다시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 하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의 그 전례를 똑같이 하는 행동이죠.

 

이번에는 약속의 땅을 벗어나 완전한 이국 땅으로 간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이런 반복적인 속임수를 정당하게 보는 시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는 아브라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옵니다.

 

아브라함은 지난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빼앗겼던 것처럼, 이번에는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깁니다.

 

그날 밤, 아비멜렉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셨죠.

 

아비멜렉, 네가 데려온 이 여인으로 인해서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이다.”

 

아비멜렉은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아니... 제가 이 여인을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브라함이 이 여인은 자신의 누이라고 했지, 아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온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내를 삼고자 이 여인을 데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내가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막아 지금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그 여인을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이다.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너는 살 것이다. 만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너와 너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죽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침에 일어나 꿈의 내용으로 인해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들을 불러 이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러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다 두려워했죠.

 

또한 아비멜렉의 모든 여인들이 태가 닫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록합니다. (20:18)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아브라함이여. 그대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오. 내가 무슨 잘못을 지었다고 나와 나의 다스리는 땅을 죄에 빠뜨리도록 하는 것이오? 당신은 합당하지 않은 일을 나에게 행하였소. 어째서 그런 것이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대답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땅입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나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까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사라는 정말로 나의 이복누이이기도 합니다.”

 

이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며 소와 양을 비롯한 많은 재물을 건네주고 또한 아브라함이 자신의 땅에서 걱정 없이 거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이에 닫혔던 아비멜렉의 집안의 태가 다시 열려 출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창세기 20장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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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도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성품에 관한 교훈을 끌어내자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대한 태도에서도 큰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오늘 저는 아브라함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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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전쟁에 휘말렸을 때,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줬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당시 저는 누구를 나의 주변에 친구로 두느냐의 문제가 우리의 신앙에 상당히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나의 신앙을 일으켜세워주고, 북돋아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응원하는 사람을 주변에 많이 두는 것, 그리고 나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라는 교훈으로 이야기를 나눴었죠.

 

이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하나님과 가까운 삶에 나아가도록 나의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내가 주변 상황에 큰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한다면 더더욱 좋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상황에 휘둘리는 연약한 사람일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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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헤브론의 마므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정착지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 (20:11)

 

아브라함이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던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자 했더라면,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 말하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초연한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는 우리가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행하여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지체함 없이 할례를 행했던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땅으로 거주지를 옮기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그곳의 사람들을 속입니다.

 

환경을 이겨내는 믿음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다다르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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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여러분의 신앙을 지킬 자신이 없나요?

 

그렇다면 신앙을 져버릴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아무도 젊은 사람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클럽에 드나드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순 없습니다만, 그런 환경에 스스로 노출되며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것이 잘못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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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를 죄의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술로 인한 문제를 일으키기 싫은 기독교인이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회식이 있는 상황을 매번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이지만, 직장 상사가 나에게 부도덕한 일을 시킬 때마다 매번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이지만, 직업이 없는 지금 당장 내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고용보험 수령을 위해서 거짓 직장면접 인터뷰를 했다는 도장을 찍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현실에서 부딪치는 기독교인들의 실제적인 고민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저 클럽에 가고자 하는 젊은 기독교인의 상황처럼,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과거 이집트에서도, 지금 네게브의 그랄 땅에서도 사람을 속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수준의 선택이 아닌,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의 선택인 것입니다.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이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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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죄를 짓도록 강요받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의로운 심령을 상하곤 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살아가던 롯의 심령처럼 말이죠.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베드로후서 2:7-8)

 

로마서에서 말하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상황에서 스스로를 곤고한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7: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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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아브라함이 나약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때,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아내를 빼앗기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런 심령이 상한 아브라함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백성의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의 환경을 이기지 못하는 스스로의 나약한 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며 내렸던 부족한 선택을 회개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삶에 개입하십니다.

 

우리는 환경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면 환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이 말을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실 테니, 우리가 세상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도 괜찮아. 그냥 이대로 살아도 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신다면 크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결코 죄와 타협하고 세상의 방식 그대로 살아갈 것을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속임수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는 선택을 할 때의 그 마음의 고난은 아내를 빼앗기는 수준입니다.

 

자신이 세상과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는 사실에 겪게 되는 신앙인으로서의 마음 고난의 수준이 아브라함이 아내를 빼앗기는 고통에 준하지 않다면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환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을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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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하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던 그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약한 아브라함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하시자,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했고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여기며 많은 재물과 거주할 장소까지 제공해줍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던 동네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아내를 잃고 고통하며 신음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잃어버릴 정도로 타인을 속이는 그 삶을 고통스러워했듯, 우리 기독교인들도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고통 하고 신음해야 합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가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그 고통 하며 신음하는 삶에 함께하시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던 우리 주변의 환경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한다 해도 희망을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과 공존하지만 동화되지 않는 삶에 대해서 나누면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죄와 타협하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로 목숨을 구하는 부끄러운 선택에, 아내를 빼앗기게 되는 그 아픈 마음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 중에 거하는 부끄러운 선택에, 날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써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되었던 그 아픈 마음

 

그 아픈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존하는 기독교인이 세상과 동화되지 않으려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매번 실패하는 모습.

 

그리고 거기에서 심령이 크게 상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 우리를 구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다시 기억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해도 다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자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기를 거부하지 마세요.

 

넘어질 때마다 마음을 아파하고 괴로워하세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도우셨던 것처럼, 롯을 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도 개입하실 것이고 환경을 이겨내는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