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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30] 이삭의 탄생,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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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나눔 030] 이삭의 탄생,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

빚진자TV 2021. 11. 6. 17:19

https://youtu.be/bEuzXLkackQ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후, 네게브의 그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랄 땅의 왕인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땅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해, 드디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그토록 기다렸던 바로 그 아들인 이삭입니다.

 

사라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십니다. 나의 웃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웃을 것입니다.”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젖을 뗄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죠.

 

하지만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함께하실 묵상 말씀은 창세기 219절과 10절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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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는 사실 이삭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었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식을 갖게 될 것이라 기대하며 기다리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사라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상황에 하나님은 자식을 가질 것이라 약속하시니 눈앞의 현실과 약속의 말씀, 그 사이에서 괴리감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죠.

 

초조하고 불안한 기다림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사라는 한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출산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는군요. 아브람. 내 여종 하갈의 몸을 빌려 자식을 얻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16:2)

 

당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갖고자 합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하갈은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무시하고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사라는 이로 인해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으며, 결국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임신한 몸을 이끌고 도망갑니다.

 

여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벗어난 행동에,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도망을 가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도망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갈은 도망가던 중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게 되고,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하시고는 임신한 아이의 후손이 크게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결국, 하갈은 다시 돌아와 사라의 여종으로 살아갑니다.

 

이때 태어났던 아들이 이스마엘이며,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80세 중반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아브라함이 100세가 된 오늘, 사라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인 이삭, 아브라함은 이렇게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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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젖을 떼고 아브라함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듯했죠.

 

하지만 어느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놀리게 됩니다. (21:9)

 

성경에서는 그저 놀렸다’, ‘희롱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서 보자면, 단순한 놀림 그 이상의 핍박과 괴롭힘을 의미한다고 성경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주인의 아들인 이삭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행동임에 틀림이 없지요.

 

마치 과거 하갈이 사라를 멸시하고 무시했던 것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행동이었듯 말이죠.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의 전례를 그대로 따라 답습하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사라가 이 광경을 목격한 뒤,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 당장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세요. 이 여종의 아들은 주인인 나의 아들 이삭과 함께 당신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크게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무래도 아브라함은 그동안의 세월을 함께 지내온 아들 이스마엘에게 아버지로서의 정을 많이 느끼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여라. 이삭으로부터 태어난 자손들이야말로 너의 후손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그도 너의 아들이니, 그를 통해서도 내가 한 민족을 이룰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아침 일찍 떠나보내며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었습니다.

 

하갈은 본래 이집트 사람이었으니, 이집트를 향해서 가는 길이었으리라 성경학자들은 추측합니다.

 

본래 자신이 왔던 곳, 자신이 속한 곳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브엘세바 광야라는 곳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가져왔던 물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마엘은 물을 먹지 못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관목 덤불 아래에 눕혀두고는 조금 거리를 두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내 아들이 죽는 것을 차마 내 눈으로 보지 못하겠구나. 나와 내 아들의 생명은 여기서 끝이구나.”

 

하나님은 어린 생명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을 불렀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일어나서 그 아이의 손을 붙들어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한 샘물이 하갈의 눈에 보였습니다.

 

하갈은 급히 자신의 가죽부대를 들고 뛰어가 물을 채워 이스마엘에게 먹였습니다.

 

이스마엘은 생명을 건졌고 장성하여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이집트로부터 한 여인을 이스마엘의 아내로 얻어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본문 말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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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이 임신하고 사라를 멸시했던 당시,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하나님은 하갈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단순하게 하나님이 하갈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리적인 장소의 변화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갈의 존재로서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며, 앞으로 어떤 존재로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본질적인 질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분에게도 던지십니다.

 

당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중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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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주어진 존재로서의 위치와 그에 맞도록 주어진 숙제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벗어나거나 주어진 숙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입니다. 여종은 여종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면 안 되고, 그 신분으로서 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체, 사라를 멸시하고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고, 하갈이 그 말씀에 순종하자 배 속의 아이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갈이 사라의 여종으로서 살아갈 때에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의 신분은 여종의 아들입니다. 그 위치를 망각하고 주인의 아들을 괴롭히면 안 되지만, 이스마엘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행동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번엔 하갈과 이스마엘 두 사람 모두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자, 하나님이 그 생명을 살려주시고 또한 그 후손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을 또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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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주어진 존재로서의 위치와 그에 맞도록 주어진 숙제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벗어나거나 주어진 숙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존재로서의 위치가 주어졌고 어떤 숙제가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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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서의 위치가 주어졌습니다.

 

이 위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한 그 창조에는 목적이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처음 부분, 천지창조에 관한 묵상을 기억해봅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의 사귐의 관계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즐거운 삶을 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자, 인류에게는 죄와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전도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우리가 창조주를 부정하고 세상이 그분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라 여기며, 인간을 피조물로 바라보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목숨을 위협받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처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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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의 예정하심에 따라 택함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가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론적인 위치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43:21)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숙제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 문답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최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어진 삶의 위치를 벗어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으며 세상에 그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목숨을 위협받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처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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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모든 우리의 존재론적 위치가 그저 주어지는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피조물로서의 삶의 위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위치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쟁취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수양과 수련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선행을 꾸준히 쌓음으로써 구원의 길에 이르고자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기독교인조차도 이 사실을 망각하고 구원이 마치 행위의 산물인 양 종교 생활의 행위에만 심취해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망각해선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구원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서의 봉사활동과 선교사업, 혹은 선한 활동들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나 교회에서 봉사했느냐, 얼마나 선교를 했느냐, 얼마나 선한 활동을 많이 했느냐는 구원의 조건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봉사와 선교, 선행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부터 주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을 망각한 체, 구원의 조건이 나의 행위에 있다고 여기며, 타인의 부족함을 정죄하고 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목숨을 위협받던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처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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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위치를 벗어나 있는 상태이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고자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기꺼이 도우시는 분입니다.

 

하갈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고자 할 때, 그리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의 집을 떠날 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위치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위치로, 구원의 은혜가 나의 종교적 행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지각하는 자의 위치로 돌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꺼이 도우실 것입니다.

 

돌아갑시다. 본래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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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어스 찬양 <여호와께 돌아가자>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은

포기 못 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